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티투스 라비에누스 (문단 편집) == 왜 카이사르에게 대적했는가? == '''[[미스터리 관련 정보|카이사르의 심복 측근이자 카이사르파의 2인자인 라비에누스가 카이사르를 왜 배반했는가]]'''에 대해선 여러가지 학설이 있다. 첫째로 라비에누스가 카이사르의 전공을 시기했다는 학설이다. 갈리아에서의 전리품 배분, 혹은 2인자라는 위치에 불만을 품고 그에게 반기를 들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실제로 기원전 50년 경 라비에누스의 충성심에 의문이 제기되는 일이 있었고 카이사르는 도리어 그를 이탈리아와 가까운 키살피나 속주로 파견할 만큼 그를 두텁게 신임했으나 라비에누스는 그 기대를 보란듯이 어기고 말았다. 라비에누스가 폼페이우스를 따른다고 해서 그의 지위가 더 나아진다는 보장이 당장은 없기는 했지만, 폼페이우스 주변에 결집한 [[과두정|옵티마테스가 원했던건 공화정의 수호, 즉 옛부터 그래온 것처럼 로마의 유력 가문들끼리 돌아가면서 1년씩 집정관 해먹고, 우리끼리 권력을 나눠가지면서 로마를 지배하자는 전통을 지키자는 것이었다.]] 이는 명예로운 경력을 밟아 더 높은 곳을 노리고자 하는 라비에누스와 이해가 일치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비록 라비에누스가 카이사르의 후원으로 뒷날 집정관에 당선되었다고 하더라도 본인의 뜻과 다르게 사실상 카이사르의 꼭두각시 겸 영원한 2인자 노릇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고 이에 대해서 불만과 야망을 가졌을 수도 있다. 라비에누스는 카이사르와 동갑으로 충분히 정치적으로 명예로운 경력에 포함된 직책들을 노려볼만한 기반이 충분히 다져진 상태였으나 사실상 [[독재]]를 휘두르던 카이사르 때문에 카이사르와 같이 집정관이 된다고 하더라도 꼭두각시 혹은 2인자로 밖에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카이사르의 동료 집정관을 역임했던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의 전례를 통해서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내전 시기까지 카이사르에게 충실했던 트레보니우스나 데키무스 브루투스가 카이사르 암살에 앞장선 것도 집정관이 되어봤자 카이사르의 꼭두각시로 머물수 밖에 없다는 것을 자각한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둘째로 로널드 사임(Ronald Syme)이 최초로 제기한 가설로 폼페이우스 가문이 위세를 떨치는 피케눔 출신으로서 자신의 오랜 파르토네스(후원자)인 폼페이우스의 은의를 저버릴 수 없었다는 시선이 존재한다. 라비에누스는 카이사르에 대해서 어떤 악감정도 없었지만 옛 주군인 폼페이우스를 버릴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반론 역시 존재하는데, 파트로네스인 폼페이우스 사후에도 라비에누스가 아프리카와 히스파니아에서 계속 카이사르에 대항해 전쟁을 했다는 것은 순전히 [[파트로누스]]와 [[클리엔테스]]의 관계로만은 설명하기 힘들다. 다만 여기서 간과한 부분으로 폼페이우스의 아들인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는 멀쩡히 도망가서 카이사르와 [[옥타비아누스]]를 괴롭혔다.[* 이 당시에 술라의 실패한 개혁으로 인해서 사실상 로마 군단병들은 군단장의 사병처럼 되어 있었고, 폼페이우스의 아들들은 군대라는 폼페이우스의 유산을 물려받게 된다. 여기서 라비에누스와의 클리엔테스 관계도 포함이라는 것. 실제로 아프리카에서 패배한 이후에 라비에누스는 폼페이우스의 아들들에게 합류한다.] 사실상 공화정의 종말을 고한 파르살루스 회전 이후 원로원파의 정신적 지주였던 [[키케로]]와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등은 카이사르에게 항복하였고,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는 문인의 길을 선택해 조용히 묻혀 지내는 상태였다. 다만 여기서 강경파이자 옵티마테스의 핵심인물들이었던 [[소 카토|소(小) 카토]]나 스키피오는 아프리카로 건너가서 계속 저항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비록 폼페이우스가 죽었다고 하더라도 스키피오는 폼페이우스의 정치적 후원자격이었으며, 폼페이우스의 아들들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계속 도망가서 아버지의 연줄을 이용해 계속 저항했다. 카이사르가 내전에서 적들을 여러차례 용서한 [[대인배]]이기는 하지만 키케로나 브루투스 등과는 달리, 자신을 이미 한번 강력히 배신한 전력이 있는 라비에누스를 카이사르가 용서했을 것이라곤 쉽게 생각하기 힘들고, 또한 라비에누스도 그것을 기대하지 않기 때문에 끝까지 싸웠을 가능성도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라비에누스는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비록 패배했지만, 아프리카의 [[루스피나 전투]], 히스파니아의 문다 전투에서 카이사르를 거의 죽일 뻔 했다.] 세번째는 라비에누스가 개인적으로 [[공화주의]]적인 신념을 가진 인물이었을 경우이다. [[순욱|카이사르의 곁에서 오랫동안 그를 보필한 것은 사실이지만]], [[조조|그가 본격적으로 야심을 드러내고 루비콘 강을 건너 내전을 일으켜 독재권을 탈취하려 하면서 로마의 국법을 어기는 행위를 좌시할 수 없었을 수도 있다.]] BBC의 다큐멘터리에선 이 설을 받아들여 그를 완고한 보수주의자로 묘사한다. 그러나 이에는 반론이 역시 존재한다. 라비에누스는 이미 카이사르의 후원으로 호민관으로 당선돼서 [[쿠리오]]나 안토니우스처럼 전형적인 카이사르가 로마에 심어놓은 카이사르파로 행동했으며 오랫동안 카이사르의 수하로 활동했다. 공화정에 대한 신념이 있는 사람이 카이사르의 부하 노릇을 했다고 하기는 영 모순이라는 것이다.[* 물론 카이사르를 따라 그의 파벌대로 행동한건 그냥 평범한 정치다툼 정도로 여겼을수는 있다. 루비콘 강을 건너 원로원에 대항하여 내전을 일으키는 건 결이 다른 행동인 [[반역]]이니까.] 라비에누스가 호민관이 된 이후에 첫 번째로 한 일들 중 하나가 호민관을 죽인 원로원 의원을 탄핵한 것이었다(물론 정상적인 보수주의자라면 호민관을 죽이는 걸 정상으로 보지는 않았겠지만). 아무튼 어떤 이유였든지간에, 라비에누스는 마치 원수라도 된 듯이 적이 된 순간부터 카이사르를 맹렬히 증오했다. 확실한 것은 카이사르의 목을 가져오라는 강경한 발언이나, 옛 부하들이었던 카이사르의 부하들을 직접 처형한 사건, 그리고 아프리카 전쟁기에서 라비에누스가 카이사르의 부하들의 앞에서 대놓고 독설을 내뱉는 등 적의를 쏟아냈다는 점에서 단순한 변심이 아닌 카이사르에 대한 강한 실망과 적대감을 품고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라비에누스는 그 어떠한 기록도 남기지 않은채 카이사르의 대적자로서 죽었고, 카이사르 또한 그의 배신의 원인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왜 카이사르를 적대했는지 후대로서는 추측할 수 밖에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